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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과 식민주의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by 파피용1 2025. 6. 24.

비건은 흔히 동물권, 환경, 건강이라는 세 축으로 논의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단어를 둘러싼 논의가 더 넓은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비건 운동이 식민주의적 요소를 내포할 수 있다는 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성찰이다. 한편에서는 비건을 윤리적 실천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서구적 가치관을 비서구 사회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형태가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 글에서는 비건과 식민주의라는 민감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를 다룬다. 비건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식문화가 배제되고, 어떤 담론이 중심이 되었는지, 또 이것이 제국주의적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비건이 진정으로 해방적이고 윤리적인 운동이 되기 위해, 지금 이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비건과 식민주의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비건과 식민주의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1.비건이 서구 중심의 윤리로 규정될 때 다양한 식문화는 지워진다

비건 운동은 근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조직화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비건 담론의 대부분도 서구 중심적 가치와 언어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에 반대하며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고, 산업 축산의 문제를 비판하는 흐름은 분명 의미 있고 필요한 작업이지만,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의 전통 식생활이 배제되거나 윤리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는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일부 비건 활동가는 고기를 먹는 모든 문화를 ‘야만적’이라 지적하며, 모든 전통적 육식 문화를 하나의 잣대로 단죄하려 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는 자연과의 공존을 전제로 한 지속가능한 수렵,채집 문화, 동물과의 관계를 종교적, 의례적으로 존중하는 식문화가 존재한다. 이들 문화는 단순한 영양 공급 수단을 넘어, 정체성과 공동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맥락을 무시한 채 비건이 도덕적으로 우위라는 식의 접근은 오히려 문화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원주민 공동체나 제3세계 지역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식문화는 서구 자본주의가 파괴해 놓고, 이후엔 서구 비건 담론이 그것을 비윤리적으로 낙인찍는 이중의 폭력이 발생한다.

이처럼 비건 담론이 문화적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식생활의 맥락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누가 먹느냐보다 어떻게 먹느냐에 집중하고, 모든 육식이 똑같이 산업적 착취로 귀결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비건 운동은 비판적이고도 포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2.전 지구적 비건 담론은 자본주의와 식민지적 역사와 맞물려 있다

현대 비건 운동은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선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세계화된 식품 산업, 국제 NGO의 자금 흐름, 건강·환경 담론을 선점한 서구 매체의 영향력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문제는 이처럼 비건이라는 담론이 글로벌 스탠다드처럼 포장되면서, 제국주의적 구조가 그대로 재현될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보카도, 퀴노아, 아몬드, 코코넛 등 비건 식단에서 자주 소비되는 식품들은 대부분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글로벌 사우스 지역에서 대규모로 재배되고 있다. 이들 작물은 채식주의자에게 윤리적인 대안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지역 주민들의 물 부족, 임금 착취, 생태계 파괴를 동반한 생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퀴노아의 경우, 볼리비아와 페루의 원주민 식량이었으나, 서구 시장에 수출되면서 현지 주민들이 자국 식량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보카도는 멕시코와 칠레에서 지하수 고갈 문제와 마약 카르텔의 개입으로 복잡한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렇듯 비건 식품이 윤리적 소비로 포장되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착취가 존재한다.

즉, 비건 운동이 산업 축산의 폭력을 비판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소비 체계를 그대로 재생산한다면, 이는 식민주의의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다. 진정한 비건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을 소비하고, 누구의 노동을 통해 그것이 만들어졌는지를 함께 고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비건은 윤리적 소비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중심주의를 넘어서 구조를 비판하고 생태적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적 실천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건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방식의 식민주의를 합리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3.비건이 진정 해방적인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교차성의 관점이 필요하다

비건 운동이 보다 정의롭고 해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교차성의 관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교차성이란, 젠더, 인종, 계급, 민족, 장애,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억압의 구조가 서로 겹쳐져 있다는 개념으로, 단일한 정체성이나 문제의식으로는 복합적 현실을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시각이다.

이 시각을 비건에 적용하면, 동물권만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윤리는 오히려 타인의 억압을 간과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일부 비건 운동은 공장식 축산을 노예제도에 비유하거나, 여성과 암소의 출산을 연결 지으며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인간의 고통을 비하하거나, 역사적 억압의 맥락을 지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비건 운동이 계급이나 지역적 접근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두가 비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지역에서는 기본적인 영양 공급조차 어려운 현실에서, 채식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때로는 비건 식단이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을 주기도 한다.

진정한 해방적 비건이란 모든 억압에 함께 저항하는 연대의 태도를 전제로 해야 한다. 인간과 동물, 자연 모두가 연결된 존재라는 인식과 함께, 누구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실천이 필요하다. 이는 비건이 단지 고기를 먹지 않는 삶이 아니라, 억압의 구조를 드러내고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차성 없는 비건은 식민주의처럼 일방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일 수 있다. 반대로, 교차성을 내장한 비건 운동은 더 많은 이들을 포용하고, 더 넓은 윤리를 향해 나아가는 열린 실천이 될 수 있다. 비건이 해방의 언어가 되려면, 그 안에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만드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