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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과 젠더

by 파피용1 2025. 6. 24.

비건 운동은 오랫동안 환경, 동물권, 건강이라는 프레임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운동을 보다 정치적이고 교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비건과 젠더의 관계다.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이 안에는 권력, 젠더, 계급, 인종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특히 비건은 종종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되거나, 남성성의 반대편에 있는 실천으로 비하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비건이 젠더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어떤 저항과 억압의 지점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이 만나는 지점, 육식이 남성성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여성 비건 실천자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긴장과 고정된 이미지들을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탐구해본다.

비건과 젠더
비건과 젠더

 

1.비건 여성은 특정한 이미지로 소비되며, 여성성과 윤리성이 얽혀 왜곡된다

현대 사회에서 비건 여성은 단지 개인의 식습관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일정한 윤리적 상징과 정체성으로 포장된다. 광고 속에서 비건 여성은 보통 마른 몸, 청순한 외모, 자연을 사랑하는 태도, 윤리적인 소비자로 표현된다. 이는 비건을 하나의 실천이자 선택으로 존중하기보다는, 특정한 여성성의 이상형을 투영하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구조다.

이러한 고정된 이미지는 언뜻 긍정적인 듯 보이지만, 여성들에게는 비건 실천을 지속할 때 지켜야 할 모범적인 여성의 역할을 강요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동물권을 말할 때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분노나 정치적 발언은 과격한 페미니스트 혹은 예민한 채식주의자로 낙인찍히기 쉽다. 이 과정에서 여성 비건의 정치적 실천은 감성의 영역으로 축소되고, 그 안에 담긴 윤리적, 사회적 메시지는 흐릿해진다.

또한, 비건 여성은 종종 백인 중산층의 건강한 신체와 경제력을 전제로 상상된다. 이런 전형은 비백인 여성, 노동계급 여성, 혹은 퀴어 여성이 비건 실천을 하려 할 때 정상적인 비건 여성이라는 기준에서 배제되거나 가시화되지 않는 현실을 만든다. 다양성이 억압당하고, 비건 운동 내부에서도 특정 정체성만이 주류로 존중받게 된다.

이러한 맥락은 단순한 이미지 소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비건이라는 실천 자체가 특정 젠더 규범 속에서 통제되고 정형화되는 과정이며, 비건 여성이 자신의 실천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만든다. 결국 비건 여성은 도덕적인 소비자이자 온화한 활동가라는 이중의 기준을 충족해야 하며, 이 기준에서 벗어날 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진정한 비건 페미니즘은 이 고정된 이미지를 벗겨내고, 다양한 목소리와 몸을 인정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비건을 선택한 여성이 어떤 인종, 계급, 성적 정체성을 갖고 있든, 그 실천이 온전히 존중받고 드러날 수 있는 운동 구조가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비거니즘은 윤리적 실천을 넘어서 억압된 몸과 목소리를 해방시키는 공간이 될 수 있다.

 

2.육식은 가부장제 권력 구조의 중심에 있으며 남성성과 결합된 상징으로 작동한다

육식이 단순한 식습관을 넘어서 사회적 권력과 결합된 남성성의 상징이라는 사실은 자주 간과된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수많은 문화에서 힘 있는 남자의 이미지와 연결되며, 이는 단지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남성 중심 문화의 실제적 권력 구조와 맞닿아 있는 현실이다.

현대 사회에서 육식은 종종 진짜 남자다움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채식을 실천하는 남성은 여성화되었다, 기죽었다는 식의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은 육식을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성별 역할을 재생산하는 상징적 실천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구조는 단지 남성의 자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비건을 실천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젠더 규범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킨다.

더 나아가, 육식은 여성에게도 특정한 역할을 요구한다.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은 고기를 요리하는 자, 서빙하는 자, 남성의 식사를 챙기는 자로 존재해왔다. 이때 고기는 힘과 지위의 상징이 되고, 여성은 그 상징을 제공하는 존재가 된다. 제사, 회식, 명절 등 다양한 한국 사회의 행사에서 여성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남성은 고기를 굽고 먹는 구조가 반복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비건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지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중심으로 형성된 권력 구조 전체에 대한 거부이자 저항이다. 여성 비건은 고기를 해주지 않겠다는 선언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탈피하는 실천을 하고 있으며, 이는 식탁 위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혁명이자, 가부장제를 흔드는 일상의 정치학이다.

비건은 젠더화된 음식문화와 권력 분배에 대해 재구성할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뿐만 아니라, 누가 요리하고, 누가 먹고, 누가 통제하는지를 묻는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단순한 식단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구조를 뒤흔드는 정치적 선택일 수 있다.

 

3.페미니즘과 비건이 교차할 때 우리는 억압의 구조를 더 정교하게 마주할 수 있다

비건과 페미니즘이 만나는 지점은 단지 이론적 공명이 아니라, 억압에 저항하는 실천의 전략이 될 수 있다. 두 운동은 모두 몸과 생명, 존재에 대한 존중을 핵심 가치로 삼으며, 타자의 도구화를 거부하고 폭력적 구조에 저항하는 점에서 깊이 연결된다.

캐럴 J. 애덤스의 육식의 성정치학은 이 교차점을 잘 설명하는 고전적 저작이다. 그는 여성의 몸과 동물의 몸이 상품화되고, 분절되고, 대상화되는 방식이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고기가 어떤 동물이었는지 지워진 채 먹기 좋게 가공된 살덩어리로 제공되듯, 여성의 몸 또한 매체와 사회에서 쓸모 있는 부위만 강조되며 전체적인 존재성은 말소된다.

이런 시선은 우리가 먹는 행위가 얼마나 깊이 사회의 권력 구조에 의해 조율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페미니즘과 비건은 보다 윤리적이고 비폭력적인 삶의 방식을 지향하면서, 서로를 보완하는 연대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 페미니즘은 여성과 자연, 동물이 비슷한 방식으로 억압당하고 지배되는 구조를 지적하며, 비건은 그 해방의 실천이 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페미니즘 내부에서는 비건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거나, 계급적 실천으로 인식되어 경계되기도 한다. 또한, 비건 운동 내부에서도 페미니즘 감수성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 여성 활동가들이 과도한 돌봄 노동이나 감정노동을 전담하게 되는 구조가 재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비건과 페미니즘이 서로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교차성의 원칙을 내면화할 때, 더 넓은 해방의 상상력이 가능해진다. 이 교차는 단지 동물을 위한 것도, 여성을 위한 것도 아닌, 이 세계에서 소외된 모든 존재를 위한 윤리적 전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비건은 더 이상 무엇을 먹지 않는가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급진적인 물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