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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과 전통음식

by 파피용1 2025. 6. 25.

비건은 오늘날 하나의 윤리적, 환경적 실천이자 문화적 전환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비건 실천이 자칫 서구적인, 혹은 현대적인 것으로만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비건이 전통과 단절된 어떤 급진적 선택으로 오해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많은 전통음식 속에는 동물성 식재료를 최소화하거나 전혀 사용하지 않는 문화적 지혜가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비건이라는 현대적 윤리가 어떻게 전통음식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고, 비건 실천을 과거와 단절된 미래지향적 운동이 아니라 전통의 가치와 지혜를 계승하는 하나의 윤리적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제안하고자 한다.

 

비건과 전통음식
비건과 전통음식

 

 

1.전통음식에는 본래부터 식물 기반 식문화가 존재했으며 이는 비건의 뿌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전통음식이라고 하면 보통 고기나 생선이 중심이 된 한상차림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전통요리 중 상당수가 식물성 재료로만 이루어져 있거나, 매우 간단한 방식으로 동물성 재료를 제외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특히 기후, 종교, 계절성, 빈곤 등의 요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전통음식은 유교적 의례 문화 속에서 육류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일상 식단에서는 오히려 곡물, 나물, 콩류, 된장과 같은 발효 음식이 중심을 이뤘다. 봄철에는 들나물, 여름에는 오이, 가지, 고추, 가을엔 버섯과 감자, 겨울엔 묵은지와 무채 같은 제철 재료들이 식탁을 채웠으며, 이러한 음식 대부분은 동물성 식재료 없이도 영양을 보충하고 맛을 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동아시아뿐 아니라, 인도의 남부 지역이나 불교권 국가들에서는 종교적 이유로 전통적으로 채식 위주 식단이 유지되어 왔다. 특히 자이나교의 영향이 큰 지역에서는 뿌리채소마저 피하며 철저한 비건 생활을 실천해왔고, 이들 문화권의 요리법은 오늘날 비건 실천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다.

중동의 후무스, 팔라펠, 타불레 같은 음식들도 본래 식물 기반 음식이다. 지중해 지역의 올리브, 병아리콩, 토마토, 레몬 등의 식재료를 이용한 전통 요리는 동물성 성분이 없어도 매우 풍부한 맛과 식감을 제공한다. 이처럼 전 세계의 전통 음식 문화 속에는 비건으로 연결 가능한 요소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일이 비건 실천의 지속 가능성을 더욱 넓혀준다.

결국, 비건과 전통음식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통 속에 깃든 지속 가능성과 자족, 생명 존중의 철학을 재발견함으로써, 오늘날의 비건 윤리를 보다 풍부하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다.

 

2.비건은 전통음식의 가치를 지키는 새로운 방식이 될 수 있다

현대 산업화와 글로벌 식품 시스템은 전통음식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다. 인스턴트 식품의 범람, 육류 중심 식단의 확산, 그리고 식재료의 지역성 상실은 전통음식이 지녀온 공동체적, 계절적, 생태적인 감각을 점차 희미하게 만든다. 이런 시대에서 비건은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실천을 넘어, 전통음식의 가치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하나의 대안적인 길이 될 수 있다.

전통음식은 지역성과 계절성, 그리고 손의 노동이 결합된 삶의 리듬 속에서 탄생한다. 나물 무치기, 장 담그기, 김치 담그기, 콩을 고아서 메주를 만들고 다시 된장을 쑤는 과정은 단지 음식 조리 그 이상이다. 그것은 자연의 주기에 맞춰 살아가는 슬로우 푸드적 삶의 방식이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지점이다.

비건은 이러한 전통적인 삶의 리듬을 되살리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지역의 농산물을 직접 구입하고, 계절 재료를 활용한 식단을 구성하며, 음식에 담긴 이야기를 공유하는 행위는 지속 가능한 먹거리 체계를 만드는 동시에, 전통의 정신을 계승하는 윤리적 선택이 된다. 비건 실천을 통해 농촌과 도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단절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열린다.

또한, 비건으로 전통음식을 재해석하면 오히려 전통이 현대화되는 길도 생긴다. 예를 들어, 기존의 고기 중심 전, 찜, 탕을 두부, 버섯, 콩 단백질, 견과류 등으로 대체해 조리하면 새로운 감각의 전통 요리가 탄생한다. 이것은 단지 비건 버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전통은 과거의 유산이지만, 반드시 보존만이 목표는 아니다. 시대와 함께 변하고, 새롭게 조합되며, 다시 쓰여야 한다. 비건은 그 과정에서 전통의 생명력을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문화의 본질은 끊임없는 전환 속에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전통음식을 비건으로 바꿀 때 필요한 감수성과 존중

비건이 전통음식과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긍정적이지만, 무조건적인 낙관은 경계해야 한다. 특히 문화적으로 민감한 전통음식을 비건 버전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전통 문화에 대한 왜곡이나 상품화의 위험도 함께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대체나 변형이 아니라, 깊이 있는 문화적 이해와 존중, 그리고 비판적 감수성이다.

예를 들어, 특정 민족이나 공동체에게는 전통 음식이 단지 먹거리 이상의 정체성, 공동체 의례, 저항의 상징일 수 있다. 이를 비건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 음식의 역사성과 의미를 무시하거나 단순히 더 윤리적인 버전으로 치환할 경우, 문화적 약탈로 비판받을 수 있다. 특히 원주민이나 소수민족의 전통음식을 글로벌 비건 트렌드로 상품화하는 경우, 그 공동체가 경험한 역사적 고통과 식민의 흔적을 삭제해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비건 실천은 전통음식과 만나려 할 때, 무엇을 대체할 것인가뿐 아니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대체할 수 없는 재료가 있다면, 그 음식이 가진 문화적 의미를 존중하고, 새로운 방식의 창작을 시도하는 것이 더 건강한 접근일 수 있다. 동시에, 해당 전통의 담지자와 직접 소통하거나, 그 공동체가 운영하는 식당이나 콘텐츠를 통해 비건화의 과정에 공동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전통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권위와 고정성에 대해서도 질문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전통은 사실상 근대 이후의 국가주의적 재편 과정에서 만들어진 관념일 수도 있고, 특정 계층이나 성별 중심의 음식문화일 수도 있다. 따라서 비건 실천은 이러한 전통의 이면을 성찰하면서, 포괄성과 다양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결국, 비건은 단지 대체하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비판적 계승과 윤리적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감수성이다. 문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비건은 그 흐름에 새로운 윤리적 질문과 실천을 던지는 살아 있는 문화적 행위로 자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