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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은 누구의 권리를 위한 실천인가

by 파피용1 2025. 6. 26.

비건은 흔히 동물권이나 환경 보호와 관련된 윤리적 실천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비건은 그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과 소비하는 물건, 입는 옷, 사용하는 화장품 등은 사람의 노동, 삶의 권리, 지역의 안전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비건은 단순히 동물 착취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과 유통의 전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지를 함께 묻는 태도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비건 실천이 노동권, 식량 정의, 이주민 권리 등 인간의 권리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살펴보며, 비건과 인권을 함께 고민하는 교차적 시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건은 누구의 권리를 위한 실천인가
비건은 누구의 권리를 위한 실천인가

 

 

1.우리가 먹는 비건 식품은 누구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비건 실천은 동물 착취를 배제하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의 노동이 어떻게 착취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 없이 완전할 수 없다. 오늘날 전 세계의 식품 생산 체계는 소수의 대규모 다국적 기업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저임금, 과로, 안전사고, 비정규직 등 다양한 인권 침해에 노출돼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시는 커피, 먹는 바나나, 아보카도, 견과류, 콩, 카카오 등 많은 비건 식품은 글로벌 남반구에서 재배되고 수출되는 경우가 많다. 이 지역의 노동자들은 종종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 낮은 임금으로 장시간 일하며, 때로는 어린이 노동과 강제 노동까지 동반된다. 이러한 문제는 식물성 식품이라고 해서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비건 식품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착취 구조가 더 심화되기도 한다.

또한, 국내에서도 농촌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열악한 노동 환경은 비건 실천과 연결된 또 다른 인권 문제다. 이들은 비닐하우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폭염과 혹한 속에서 장시간 일하며, 언어 장벽과 고용주 의존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우리가 먹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그들의 착취 위에 쌓여 있다는 사실을 비건 실천 속에서 어떻게 다뤄야 할까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단순히 동물 없는 제품이 아니라 사람의 권리도 존중되는 생산 과정이다. 이를 위해 비건 실천은 공정무역, 노동권 보장, 지역소농과의 직거래, 이주노동자 권익 옹호 같은 움직임과 연결될 수 있다. 윤리적 소비란 단지 친환경이나 비건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를 묻고 선택하는 정치적 행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2.비건은 식량 정의와 식품 접근성의 문제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비건 식단은 많은 이들에게 건강하고 윤리적인 선택으로 제시되지만, 그 실천에는 식재료에 대한 경제적, 지리적 접근성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는 신선한 채소나 비건 제품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또 어떤 지역에서는 마트에 채소가 부족하거나, 비건 옵션이 극히 제한적이며, 가격 또한 높게 책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도시와 농촌, 중심과 주변, 부유한 계층과 저소득 계층 사이의 식품 접근성 격차를 드러낸다. 단순히 채소만 먹으면 된다는 말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특히 공공급식, 군대, 병원, 교도소, 학교 등의 집단 식사 구조 안에서는 비건 선택권이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비건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 사이에 계급과 권력의 차이가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식량 정의라는 개념은 단지 먹는 권리를 넘어서, 누가 어떤 음식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이 어떤 권력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를 묻는 정치적 개념이다. 이는 비건 운동이 단지 동물 제품을 배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먹을 권리, 선택할 권리, 건강할 권리,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받을 권리와 연결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예컨대, 미국 내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건강한 먹거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실 속에서 비건은 단지 윤리적 실천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건강권 투쟁으로 확장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독거노인, 청소년, 장애인, 이주민 등 소외된 집단이 어떤 식으로 비건 실천에서 배제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결국 비건은 단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선택과 실천의 자유를 누구나 가질 수 있도록 만들려는 정치적 운동이기도 하다. 따라서 진정한 비건 실천은 식량 정의와의 연대 속에서 완성된다.

 

 

3.동물 해방의 윤리가 인간 해방과 충돌하지 않도록 비건은 교차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

비건 운동은 동물 해방을 중심에 둔 윤리적 실천이다. 그러나 동물 해방을 위한 실천이 오히려 인간 해방과 충돌하거나, 누군가의 삶의 맥락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위험도 있다. 특히, 문화적 전통이나 생존을 위한 사냥, 종교적 의례 등에서 동물 소비가 포함된 경우, 일방적인 비판은 오히려 식민주의적 시선이나 문화적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북미나 북유럽의 일부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공동체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동물 사용이 이뤄진다. 이들은 산업화 이전부터 자연과의 순환 속에서 동물과 관계를 맺어 왔으며, 대체할 수 없는 생존 기술로서 동물 식품을 사용해왔다. 그런 공동체를 향해 무조건적인 비건을 요구하는 것은, 서구 중심적이고 일방적인 윤리 기준의 강요가 될 수 있다.

또한, 특정 문화권의 음식과 관습은 그들의 역사, 정체성,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를 비건이라는 이름으로 잔인하다, 비윤리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삶의 방식과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행해지는 비판일 수 있다. 비건 실천이 진정으로 윤리적이기 위해선, 자신이 속한 위치성을 자각하고, 타인의 삶의 맥락을 경청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차성이다. 교차성이란 단지 동물의 권리만이 아니라, 인종, 계급, 젠더, 지역, 역사, 문화 등 다양한 억압 구조와 윤리적 실천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함께 바라보는 시각이다. 비건은 이러한 복잡한 얽힘 속에서 누구의 권리를 옹호하고, 누구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실천이 되어야 한다.

동물 해방과 인간 해방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존재의 해방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그리고 그것을 서로 충돌시키지 않고 조율하며 나아가려는 태도가 비건 운동을 더욱 강하고 넓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비건 세상은, 동물과 인간 모두가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구조를 함께 고민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