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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과 비건

by 파피용1 2025. 6. 20.

우리는 매일처럼 식탁 위에서 다양한 선택을 한다. 고기, 생선, 유제품, 달걀 등 동물에서 유래한 식품들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간 우리의 식생활에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이 음식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접시에 오르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음식은 단지 영양소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생명체의 삶이기도 하며, 그 생명에 대한 사회의 태도와 철학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비건이라는 단어는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단순한 유행이나 건강식이 아니라, 생명을 대하는 윤리적 자세로서의 비건이 조명받고 있는 시대다. 동물권이라는 단어 또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고기를 먹기 전 반드시 알아야 할 동물권의 현실과, 그로 인해 비건이라는 선택이 왜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동물권과 비건
동물권과 비건

 

1.우리의 식탁에 가려진 동물의 고통

고기, 달걀, 우유. 이 모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식품들을 선택할 때, 그 생산 과정에서 동물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대부분 모른 채 지나간다. 대부분의 동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목가적인 농장이나 들판에서 자라지 않는다. 오늘날 식용 동물의 대부분은 공장식 축산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길러진다.

공장식 축산은 식량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물의 생을 철저히 관리하고 조절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달걀을 생산하는 암탉들은 배터리 케이지라고 불리는 A4용지보다 좁은 철창 안에 수십 마리가 겹겹이 쌓인 채 사육된다. 날개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한 채,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환경은 심각한 스트레스와 골다공증, 깃털 손실, 자기 혹은 타 동물을 쪼는 이상 행동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는 단지 산란 효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된다.

돼지의 경우, 어미돼지는 임신사라는 좁은 틀 안에서 몸을 돌릴 수도 없는 채로 4개월을 지낸다. 새끼가 태어나면 급속하게 키워져 도축된다. 도축되는 시점은 생후 6개월 전후로, 자연 상태라면 10년 이상 살 수 있는 돼지들이 매우 이른 시기에 생을 마감하는 셈이다. 송아지나 육계도 다르지 않다. 유제품을 위해 태어난 수컷 송아지는 우유를 생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며칠 안에 도축되며, 육계는 빠르게 살을 찌워 35~40일 만에 도축장으로 향한다.

공장식 축산은 동물을 숫자화하고, 생명을 물건처럼 다루는 시스템이다. 이 안에서 동물은 삶을 살지 못한다. 단지 인간이 원하는 속도와 형태로 자라고 죽어야 할 생산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 잔혹한 현실이 고기 한 조각, 달걀 하나, 우유 한 컵의 뒤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동물도 고통을 느낀다, 감정을 지닌 생명에 대한 윤리적 고찰

동물은 고통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논쟁이다. 과학계는 물론, 철학자와 윤리학자들은 동물이 신경계를 통해 고통과 공포,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돼지는 지능적으로 개와 비슷하거나 더 뛰어나다는 연구도 있으며, 소는 인간의 얼굴을 기억하고, 닭은 사회적 위계를 파악하며, 암탉은 새끼를 돌보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동물은 감정을 지닌 존재이며, 생명체로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하지만 현재의 축산 시스템은 이러한 생명의 감정과 권리를 무시한 채 운영되고 있다. 도축 과정은 특히 잔혹하며, 대부분의 도축장은 빠른 속도와 효율성을 위해 동물의 공포와 고통을 줄이는 최소한의 조치조차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부 도축장에서는 제대로 기절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동물이 해체되는 일도 발생한다. 이는 단순한 관리 실패가 아닌,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잔인함이다.

윤리적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단지 우리의 입맛을 위해 죽여도 되는가? 이는 단지 식습관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생명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가, 어떤 철학으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동물이 인간보다 지능이 낮다고 해서, 혹은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권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주장은 마치 과거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비건은 이러한 윤리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 고통에 책임져야 한다. 비건은 착한 소비자가 되기 위한 선택이 아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바라보고, 타 생명에 대한 공감과 책임을 실천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것이 설령 나에게 불편하고 낯설더라도, 고통받는 누군가를 위한 선택이라면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며, 바로 그 윤리적 책임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3.비건은 윤리적 연대로 가는 길

비건은 단지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깊은 질문이며, 동시에 사회 전체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좁은 철창 안에서 고통 받고 있고, 매시간 수만 마리의 동물이 도축장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그 현실을 모르거나, 혹은 외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알게 된 이상, 더는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

비건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응답이다. 윤리적 연대의 방식이자, 생명을 향한 공감의 실천이다. 고기 없는 식사를 선택하는 것,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화장품을 고르는 것, 동물 가죽이 아닌 식물성 소재의 가방을 드는 것, 모두가 비건의 일상적인 실천이다. 작게는 나의 삶에서 시작되지만, 그 영향은 사회와 문화, 제도에까지 뻗어간다.

비건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품 산업도 변하고 있다. 식물성 대체육과 비건 치즈, 비건 화장품 등이 빠르게 확산되며, 기업들은 더 이상 동물 착취를 비즈니스 모델로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이는 소비자의 윤리적 선택이 만들어낸 변화다. 개개인의 선택이 모여 구조를 바꾸고, 구조의 변화가 다시 개개인의 삶을 바꾼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소비의 힘이다.

우리가 오늘 그냥 고기를 먹는다는 단순한 결정 속에는 누군가의 삶과 죽음, 누군가의 고통과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비건은 더 이상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으로 다가온다. 나는 나 하나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내가 바뀌면 세상이 나를 따라 조금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 조금이 모이면 세상이 바뀐다. 동물과의 공존, 생명에 대한 존중, 그리고 윤리적 연대. 이것이 우리가 비건을 통해 꿈꾸는 세상이다.